잊지 않기 위해 해 두는 메모. 이 책은 여러 재난을 겪은 사람들의 경험담을 통해 인간이 재난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가를 통계적으로 제시하면서 갖가지 재난에 닥쳤을 때를 대비, 자신의 '재난 두뇌'를 훈련시킬 것을 강조하는 일종의 연구서이다. 2001년 9월 11일의 소위 9/11 테러 이후로 쏟아져 나왔던 재난 관련 서적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나 자신도 꽤 겁이 많은 편이면서도 육체를 훈련시키거나 정신을 단련시키는 데 게으른 인간 중 하나니까. 사실 이런 류의 극한 상황이 닥치면 제일 먼저 나가떨어져 버릴 인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덕분에 '공황'이라든지 '마비' 등의 반응에 관련된 장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가장 낯선 장은 역시 '영웅주의'에 관한 부분. (쩝)
재난 상황에 닥쳤을 때 사람들은 의외로, 생각지도 못할 만큼 천천히 움직인다고 한다. 누군가가 강압적으로 이것저것 지시해 주는 상황이 훨씬 많은 수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물건을 여럿 챙긴다든지(이런 종류의 행위를 칭하는 gathering이라는 명칭이 따로 있었다) 자신도 탈출을 위해 나가는 중이면서 남들에게 예의바르게 길을 양보하고 타인을 돕는다든지 하는 행위들이 속속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이타심이나 자신의 평판을 위한 (무의식적)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일종의 '거부' 단계의 행동에 속한다고 한다. 즉 자신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피하고 거부하고 싶어하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로 인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탈출 지연이 발생하고 위험도가 높아진다. 혹은 예전에 자신이 비슷한 상황을 겪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이유로 재난 발생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잘 모르고, 자신의 통제권 밖에 있는 재난에 대해서 더 큰 공포를 느낀다. 실제 통계에 의하면 자동차보다 비행기로 인한 사고 확률이 훨씬 낮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비행기 공포증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비행기를 무서워하다가 조종을 배우고 나서 공포증을 극복했다는 실례가 많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일단 위험을 의식하고 나면 인간의 몸은 공포로 인해 평소와 다른 상태로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터널 시야(tunnel vision)이라든지 갑자기 너무나 모든 것이 잘 보이고 잘 들린다든지 하는 범상하지 않은 신체의 반응이다. 실제 재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인생에서 최고로 긴 몇 초간' 이었다고 회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극한 상황으로 인해 뇌가 평소라면 잊어버렸을 수많은 것들을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늦게 간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혹은 갑자기 유체 이탈과 비슷한 해리 현상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특수부대 대원들과 같이 특정 훈련을 받고 재난 상황에 반응이 빠른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유전적 특징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반인들에 비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 분비가 적고 회복력도 원래 빨랐다고 한다. 그리고 재난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집단 사고를 하게 되는 경향이 높다고 한다. 그렇기에 통제가 잘 되고 적절한 지시를 내려주는 사람,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재난의 피해는 최소로 줄일 수 있다.
예루살렘의 하지 때는 엄청난 수의 군중이 성지 순례를 위해 모이는데, 이 때 언제나 많은 인명 사고가 발생한다고 한다. 이는 소위 공황 상태때문인데, 그 전까지는 평화롭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아주 작은 시발로 인하여 갑자기 공황 상태의 인간 덩어리가 되어 타인을 덮치는 것이다. 공황이 나타나는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꽤 재미있었다. 아예 생존의 가능성이 없는 경우에는 오히려 공황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생존 가능성이 약간 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발생하는 무력감(울거나 소리지르는 사람들), 그리고 타인으로부터의 고립감과 경쟁을 경험할 때 공황이 발생한다. 실제 군중들 사이에 깔려 죽는 사람들은 '실제로 짓밟혀' 죽는 것보다는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지 않아 산소 부족으로 먼저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건물 설계자들의 기본적 가정인 '흐르는 물'과 달리 출입구 주변으로 아치 형을 그리며 모여드는 사람들 사이의 마찰력때문에 실제로는 아무도 밖으로 제대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 꽤 흥미로웠다.
재난시 개인이 경험하는 공포스러운, 그리고 무척 흔한 현상은 신체와 정신의 마비이다. 평소에 예민하고 민감한 편인 사람들이 재난 상황에서 마비되는 현상을 더 많이 경험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비이성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행동, 즉 화재시 산소 마스크를 뗀다든지 하는 행동들도 그 마비 현상의 일환이다. 실제 자신에게 산소를 공급하고 있는 유일한 원천임에도 불구하고, 입 앞에 달린 마스크가 자신의 호흡을 방해하고 있다고 느끼는 현상으로, 사실은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다. 진화학에 의하면 마비는 죽은 듯한 모습으로 포식자에게 매력도가 떨어지는 먹이로 보이기 위한 행동이라는데, 이로 인해 오히려 죽음을 맞는 경우도 있다. 마치 최면과도 같은 이 현상은 큰 소리 정도로도 금새 깰 수 있다고 한다.
영웅주의와 관련된 장에서는, 통계적 경향에 의해 영웅들은 주로 남성이며 노동계급의 사람들, 특히 타인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고 서술한다. 즉 남들에게 도움을 받기보다는 주는 쪽으로 프로그램화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중독되어 재난 현장마다 쫓아다니다가 피해를 일으킨 전 영웅들도 있다고 하니 사람 일이란 모를 일이다.
그리 얇지 않은 이 책 내내, 저자는 재난 발생을 대비한 훈련과 두뇌 프로그래밍을 누누히 강조한다. 세계무역센터 테러 당시 계단이 어디로 연결되는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으며, 옥상 문이 잠겨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직원은 50%밖에 되지 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대피를 위해 옥상을 향해 올라갔다가 잠긴 문 앞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에 반해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을 받은 어린아이가 카트리나 재해 당시 해변가에 있던 사람들에게 경고해서 그 해변가에 있던 단 한 명도 죽지 않을 수 있었고, 쓰나미에 대비한 전통적인 지식을 구비하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다들 높은 곳으로 대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살아남고 싶은가? 그럼 이 책을 읽고, 언제 있을지 모를 재난에 대비하라. 이것이 이 책의 포인트이다.
Posted by 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