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 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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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0 토요일 19:00
남명렬(사드) / 홍원기(마라)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 비지정석
105분, 인터미션 없음

오랜만에 보는 연극이었는데, 미리 예매를 해 두고 기다린 보람을 목구멍 끝까지 채워주었던 공연. 정말 기대 이상으로 괜찮았던 작품이었다. 프로그램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다시금 공연을 볼 때의 느낌을 음미하고 있는데, 아는 사람을 하나하나 다 붙잡고 꼭 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작품일 정도니- 10일간만 하고 막을 내리는 게 아쉽지만 시간이 맞으면 다시 한 번 가서, [사드]식 결말을 보고 싶다.

기본적으로 사드 후작이 기거하고 있는 수도원 소유 정신병원 안에서, 환자들이 공연하는 극중극의 모양새를 띠고 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시공간을 초월한다. 환자들의 복장과 태도, 대사는 극히 현대적이지만 그들이 논하는 아이디어는 근대로부터 발동한 것이고, 간간히 섞여 나오는 역사적 사실은 18세기 후반 프랑스라는 명확한 시간과 장소를 가리키고 있는데 이 묘한 부조화가 공연에 독특한 느낌을 부여하고 있었다. 사실 정신병원 환자들의 소란하고 부산한 연기 중에 심오한 철학적 개념을 담는다는 컨셉 자체는 신선할 것이 없지만 - 페터 바이스의 원작은 60년대의 작품이므로 당시에는 물론 획기적이었을 수도 - 이 연극에서는 상당히 효과가 좋았던 장치였다. 프랑스 혁명과 그 이후의 역사적 사건들은 확실히, '광기'라는 측면에서 정신병원에 수감된 사람들의 그것과 닮은 점이 있다.

- 혹자는 프랑스 혁명을 희대의 삽질극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가벼운 충격을 받았는데(그도 그럴것이, 나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경도되고 오스칼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여중생(...)이었다고!) 생각해 보면 그 거친 표현 자체를 제외한다면 꽤 맞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사람들이 그 전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개념과 권리들을 인지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사고와 인식의 발전이 점차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프랑스 혁명 그 자체는 왕도 아닌 황제의 등장으로 그 1차적 종말을 맞았으니까. 그 뒤로 나타난 것은 왕당파의 복귀, 혼란과 절망, 그리고 자본가라는 새로운 이름의 귀족들이었다.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것도 그 '혁명 이후'에 비중이 실려 있다. 그 뒤의 수많은 혼란과 어쩔 수 없는 인간 본성으로 인한 행패와 절망을 볼 때 과연 계몽과 혁명, 민중을 중심에 내세운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다. 사실 여기에 답은 없다고 본다. 사드 후작의 주장대로 '인간은 밑바닥에 다다르면 고귀한 가치따윈 잊고 극히 본능적인 것에 침잠하게 된다, 결국 집단 행동이란 광기를 낳으며 수많은 부작용과 파괴를 초래할 뿐이다' 라는 말 또한 역사가 증명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의와 공익, 역사의 발전을 위한 행동의 가치'를 역설하는 마라의 말 또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같은 사건이라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나 전기의 발명, 산업 혁명 전쟁 등 인간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들은 모두 쟁점의 대상이 된다.

- 이 작품의 묘미는 물론 그 결론낼 수 없는 주제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선택한 결말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를 기다리는 초조함에도 있다. 티켓을 끊을 때 [마라]와 [사드]가 적힌 빨갛고 까만 마분지 조각을 하나씩 준다. 연극을 다 보고 나서, 일종의 오픈엔디드 극 형식으로 관객들의 선택에 따라 그 중 하나의 결말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 결과가 떠오를 하얀 화면을 지켜보는 그 스릴감이란. 내가 내린 결정이 어떤 사람에게, 어떤 모습으로, 궁극적으로는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결코 작지 않은 부담감. 결정을 내리는 사람의 위치와 그 심리적 압박을 잠시나마 맛볼 수 있었다. 만약에 내가 내린 결정이, 저 수많은 인간을 죽게 하는 전쟁으로 이끌어진다면. 나의 판단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선량한 사람들이 집을 빼앗기고, 가족과 헤어지게 된다면- 그래도 나는 '그 때는 내 결정이 최선이었다' 라고 말할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 나는 마라를 택했다. 개인적으로는 사드 후작의 세계관에 무척 동조하고는 있으나, 사회 문제에 관해서는 조금 다를 수밖에 없고 달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결국 변하겠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닐 테니까. 광화문과 종로의 촛불을 생각해 봤다. 그리고 그 이후의 절망과 패배주의,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 혹은 분노할 기운을 잃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권력을 가진 자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하루가 다르게 뉴스화되어 터지는 저 추악한 사람들의 모습을. 저런 모습에 분노하면서 마라를 외면하는 건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의 결말은 알 수 있었지만, 현실의 결말은 어떻게 될런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 답답할 뿐.

- 한 번 더 보고 싶다. 사드 후작 역의 남명렬씨는 카리스마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배우였다. 사실 낯간지러워서 카리스마라는 단어는 사용을 자제하는 편인데, 이 분에게는 아낌없이 쓸 수 있다. 형형한 눈빛과 비쩍 마른 얼굴, 나이에 비해 상당히 단련된 몸에서 풍겨나오는 냉철한 분위기와 목소리와 대사의 톤에서 느껴지는 퇴폐적인 분위기가 맞물리면서 완벽한 몰입을 가능하게 해 줬다. 그에 비해 마라는 약간 약하다는 느낌이었는데, 그래도 군중들에게 시달리면서 마치 십자가에 매어 달린 예수처럼 공중을 휭휭 도는 장면에서는 그 사시나무같은 몸과 흔들리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어울렸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장면은 마치 종교적 의식을 방불케 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마라 자체가 예수의 현신같은 이미지를 그려내려고 한 듯, 머리에 씌운 붕대는 가시나무 관같고. 헤어스타일도 비슷하고. 다비드의 그림에서 보던 그 강인한 육체의 마라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 시종일관 음울하고 진지한 이 연극에서, 뒤페레 역이 꽤 많은 웃음을 선사했다. 가끔 성행위를 묘사하는 장면이 등장할 때가 있었는데, 코르데의 드레스 아래를 호시탐탐 노리는 성도착자 귀족 뒤페레의 캐릭터는 왠지 바바리맨(...)을 떠올리게도 했다. 입으로는 대의를 외치면서 사랑하는 여자를 사지로 보내고 내내 섹스 생각에만 몰두하는 귀족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는데, 뒤페레도 그렇고 군중들의 모습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사드 후작의 주장에 좀더 힘을 실어주는 연출이라는 느낌. 현대인들의 시각에서는 사드 후작의 주장이 보다 매혹적으로 들리기는 하겠다.

- 좀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는 연극이었는데, 지금 생각나는 건 이 정도. 18일까지 공연하는데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모르겠다. 주말마다 너무나 바빠서. 흑.

Posted by 레이

2009/10/11 01:56 2009/10/11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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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eliel 2009/10/16 06:54 # M/D Reply Permalink

    마라, 사드 보셨군요! 일년도 훨씬 전 일이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잠깐 수면 위로 떠올라 인사드렸다가 다시 가라앉았던 meliel입니다.

    전 연극은 보지 못했지만 원작을 읽었어요. 예니 출판사판으로 읽었는데, 내내 압도당할 정도로 강렬하더군요. 꽤 얇은 책인데도 몰입도가 굉장한 데다가 소름이 끼쳐서 읽는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연극이 원작의 강렬함을 잘 표현했는지 궁금하네요. 만약 아직 원작을 읽지 않으셨다면 강추입니다 :)

    1. 레이 2009/10/17 07:15 # M/D Permalink

      저도 원작을 읽어보고 싶네요. 6-70년대의 소위 운동권에서 엄청나게 읽히고 인기를 모았던 작품이라고 들었어요. 지난 공연에 비해서 이번은 보다 소규모에, 원작의 분위기에 충실해졌다고 하더군요. 법정같은 느낌의 무대연출이 인상적이었는데 원작도 그런 공간을 염두에 두고 진행되는지 궁금하네요. 주말에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려고 해요. :)

      그나저나, 물론 meliel님 기억하고 있지요 :D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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