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였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봤다. 보리밭, 보리밭, 발음이 귀엽고 동글동글해서 몇 번이나 되씹어 보게 된다. 정작 영화는 그리 동글동글한 내용이 아니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는 강렬하거나 처절하지 않았다. 단지 권력에 대항해 싸우다가 분열되는 그 모습이, 예전에 배웠던 한국의 역사와도 참 닮아 있어서 슬펐다. 살아보지 않았어도 상상할 수 있다. 신념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이란 어떻게 보면 범접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모두가 할 수 있되 결코 모두가 할 수 없는 것이니까. 데이미언과 테디 둘 다 사랑하고 사랑받던 이웃에게서 '너를 절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라는 말을 듣게 될 짓을 저질렀지만, 그들의 신념에 따르면 그 때의 선택이 최선이었다. 사실 영화는 데이미언의 인생에 손을 들어주고 있지만 테디의 상황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얼마 전에 봤던 <마라, 사드>가 또 생각났다. 프랑스 혁명을 반절 정도 성공시켰다고 생각했던 그 시점에서 그들은 분열됐다. 그것도 산산조각났고, 그 뒤로는 서로 싸우기 시작했고, 주변의 공격을 받게 되고, 그 사이에 왕당파가 재집권을 하게 됐다. 어쩌면 이렇게나 아일랜드의 독립 역사와 비슷하며, 한국 현대사와도 유사할까. 마치 정해진 역사의 수순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슬픈 아일랜드>를 읽을 때 초반부에 그런 말이 나왔었다. [한국과 이탈리아를 비슷하다고 하지만 사실 한국과 매우 비슷한 사람들은 아일랜드인들이다] - 역사도, 성향도 비슷하다고 했던가. 어렸을 때 IRA에 관한 내용을 읽었었다. <먼나라 이웃나라>였던 것 같은데, 꽤 객관적으로 잘 서술되어 있었던 기억이다. 잉글랜드의 눈가리고 아웅식 유화 정책 - 영화에 나왔던 게 아마도 이것 - 때문에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더 이상 가열하게 투쟁하지 않게 되었고, 서서히 IRA는 귀찮은 테러 조직으로 여겨지면서 그 규모가 축소되게 되었다고. '아일랜드는 이렇게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임은 맞을지 모르지만 끝까지 싸울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있느냐는 또다른 문제인 것이다. 사람들이 반드시 가치가 있는 대상에 자신을 거는 것은 아니니까.
잉글랜드 군인들이 시니드의 머리를 마구 자르는 장면은 끔찍했다. 강간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기에는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뭔가 맞지 않았기에 - 물론 치열한 독립투쟁이지만 의외로 잔인하거나 역겨운 육체적 고문은 별로 나오지 않았다 - 머리를 자르는 걸로 대체한 건가, 싶었지만 충분히 보기가 괴로웠던 장면. 특히 당시의 여성들에게 머리를 자른다는 건 강간과도 같은 의미였으리라. (실제라면 저렇게 넘어가지 않았겠지, 라고도 생각했다. 역사 시간에 본 일제의 횡포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가;;) 문득 교련 시간에, 혹은 등교하는 정문에서 머리가 길다며 가위로 마구 자르던 학창 시절의 선생님과 잘린 머리카락을 보며 울고 있던 아이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어제는 제이미 올리버의 요리 프로그램 중 한 에피소드, [An Englishman and An Irishman]을 봤다. 아일랜드식 요리를 배우는 제이미의 모습이었는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잔상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보고 있으니 그것도 참 미묘한 느낌. 하지만 요리는 칼로리 가득, 기름 가득, 맛있어 보였다. 꺅.
Posted by 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