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홉스봄은 현재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소위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인권적 제국주의에 대해 반대하고, 전세계적으로 소규모 집단에 의해 자행되고 있으나 대규모의 인명 피해를 가져오고 있는 비공식적 폭력 현상에 대해 분석하며 21세기형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향방, 그리고 이러한 시대에서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나름의 방책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16세기의 스페인과 17세기의 네덜란드(에 대해서는 애매한 입장이지만)를 열외로 한다면 현재 미국의 제국주의와 비교해볼 수 있는 유일한 역사 속 제국이었던 대영제국과의 비교 대조를 통해 미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쓴 부분도 흥미롭더군요. 가끔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었습니다만, 글의 전체적 논지에 관해서는 동의합니다.
20세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무력 분쟁을 통제하거나 해결할 능력과 권위를 갖춘 국제적인 체제가 없다. 경제, 기술, 문화, 심지어 언어에서도 세계화는 큰 진전을 이뤘다. 그러나 정치와 군사 분야는 예외다. 그 분야에서는 지금도 개별 국가가 유일한 권위를 갖는다. (...) 그러나 21세기와 20세기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전쟁은 공권력을 독점하는 각국 정부가 통치하는 영토로 나뉜 세계에서 일어난다'는 개념이 21세기에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지금은 개별적인 국가가 군사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고 국제 체제가 더욱 다극화하면서, 여러 관련 국가가 동의를 해야 그나마 통제가 가능한 시대다. (...) 진정한 의미에서 중립으로 인정되고, 안전보장이사회의 사전 승인 없이도 행동을 취할 능력이 있는 국제 중재 기구가 없는 것이 분쟁 관리 체제의 가장 큰 허점이다. (1장 : 21세기의 전쟁과 평화)
UN의 신뢰도 추락이나 낮은 영향력 행사는 워낙 많이 제기되어 온 문제입니다만, 여기서도 꽤 위험한 부분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중재기구의 이름을 들자면 UN밖에 생각나는 게 없는 실정이니. 이라크전과 알 카에다에 대한 전쟁 선포 등을 거치면서 이런 유명무실함이 확실하게 드러났었지요. 즉 정통성이 낮은 정부와 비국가조직의 정부 못지 않은 파급력, 그리고 강제성 없는 국제기구로 인해 21세기의 소규모지만 항구적인 무력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그럼에도 세계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추세가 감지된다. 국가 그 자체의 위상이 변해 간다는 사실이다. (...) 다국적 기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의 세계화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다. (...) 급속한 세계화는 지역적인 불균형을 초래한다. 세계화는 그 속성상 불균형적, 비대칭적 성장을 만들어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 첫째, 통제를 벗어난 자유시장의 세계화가 급속도로 불평등을 양산하면서 불만과 불안정의 온상이 되고 있다. (...) 복수의 강대국이 균형을 이루는 국제 체제가 없다.
미국은 무기가 아니라 막대한 자국의 경제력과 그것을 기반으로 맡은 세계의 중심 역할로 지배권을 잡았다. (...) 미국의 패권은 부유국들이 자신들의 체제가 공산 정권보다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 미국이 개척하고 전파한 부유한 소비 사회의 매력과 할리우드가 세계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미국이 패권을 잡을 수 있었다. (...) 미국은 "독재"와 맞서는 "자유"의 본보기라는 데서 큰 득을 봤다. (...) 그러나 9.11 사태 이후 미국의 정책이 과대망상주의에 빠지면서 기존의 지배력을 떠받쳤던 정치적, 이념적 기반이 대부분 무너졌다. (...) 단지 미국이 좀 더 위험하지 않은 초강대국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2장: 21세기의 전쟁과 평화, 그리고 패권)
미국은 무기가 아니라 막대한 자국의 경제력과 그것을 기반으로 맡은 세계의 중심 역할로 지배권을 잡았다. (...) 미국의 패권은 부유국들이 자신들의 체제가 공산 정권보다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 미국이 개척하고 전파한 부유한 소비 사회의 매력과 할리우드가 세계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미국이 패권을 잡을 수 있었다. (...) 미국은 "독재"와 맞서는 "자유"의 본보기라는 데서 큰 득을 봤다. (...) 그러나 9.11 사태 이후 미국의 정책이 과대망상주의에 빠지면서 기존의 지배력을 떠받쳤던 정치적, 이념적 기반이 대부분 무너졌다. (...) 단지 미국이 좀 더 위험하지 않은 초강대국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2장: 21세기의 전쟁과 평화, 그리고 패권)
홉스봄은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거머쥐고 있는 현실 뿐 아니라 그 현상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하거나 비난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럴 수도 없지요.) 미국이 현재 제어장치가 없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임은 주지의 사실이되, 비합리적인 폭력을 휘두르며 야만적인 행위에 앞섦으로써 세계 평화를 해치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지 않기를 원할 뿐이지요.
그래서 3, 4장에서는 19세기~20세기의 대영제국과 현재의 미국을 비교하면서 그 차이점에서 미국이 무언가를 깨닫기를,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적 압력 행사를 통한 실제적 미국 제국의 달성은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단 서구적 우월성은 이미 몰락했으며 현지인의 서구화에 대한 매혹도도 낮고 (그래서 제국적 지배에 꼭 필요한 현지인의 순종과 협조 또한 기대할 수 없다) 정부 차원의 군사력으로 영토 내부를 장악하기도 힘들기 때문이지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어륀지- 가 생각나더군요. 홉스봄은 '한국같은 나라가 미국에서 배워 올 게 거의 없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어째 한국의 영어 교육만은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군요. 아니, 이 정부 들어서 내내 그래요.
그런 불안정은 오랫동안 국가가 장악해 온 공권력과 정부군의 무력 사용에 대한 독점권이 쇠퇴함으로써 더욱 심해졌다. (...) 이런 사태 발전이 가져 온 한 가지 불길한 결과는 세계가 2차 세계대전 이래 다시 대량학살과 '인종청소'의 재앙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 최근 몇 십년 사이에 일어난 세계화의 놀라운 속도와 그것이 인간의 활동에 미치는 영향이다. (...)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신분증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발급한 출생 증명서가 아니라 국제적인 신분증, 즉 여권이다. (...) 외국인 혐오증의 명백한 강세는 국제적인 집단 이주의 증가만이 이유가 아니라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의 사회적인 대변동 및 도덕적 붕괴때문이기도 하다. (...) 외국인 혐오증은 문화적으로 규정된 국가 정체성의 위기를 반영하기도 한다. (5장: 새로운 세기의 민족과 민족주의)
사실 민족주의에 관해서 좀더 많은 글이 있기를 바랐는데, 아무래도 이제 막 외국인의 유입이 시작되면서 단일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에 위기를 겪기 시작한 한국과 이미 수많은 외국인들의 유입으로 인해 수도 등의 대도시에서는 외국인의 비율이 매우 높은 서유럽 국가들과는 문제 의식이 좀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아무래도 저자는 서구, 그 중에서도 서유럽인의 시선으로 써내려 가고 있으니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책을 좀 찾아보아야 할 듯.
자유 민주주의는 다른 정체와 마찬가지로 그 시행을 위해서는 정치 단위가 필요하다. 그 정치 단위란 통상적으로 말하는 '국민국가'다. (...) 자유 민주주의 정부가 항상, 그리고 그 자체만으로도, 비민주 정부보다 우월하거나, 적어도 좀 더 바람직하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 "민주주의는 지금까지 시도해 본 제도들을 제외하면 최악의 정체다." (...) 자본주의가 세계화된 현단계가 국민 중심주의의 기본을 무너뜨릴 것이다. 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에 이미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줄 것이다. (6장: 민주주의의 전망)
자유 민주주의를 다룬 부분에 있어서는 갸우뚱하게 하는, 혹은 한국의 실정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론적으로는 맞지만 수긍할 수 없는 부분이 좀 있었습니다. 어차피 '모든'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여 결정할 수 없는 기본적인 한계가 있으니만큼, 국민의 의사를 따르면 정부는 더욱 곤경에 빠지므로 국민의 의지를 기초로 정부의 업무를 결정할 수는 없다는 부분이었지요. (물론 실제로 현재로서는 이 딜레마에 대한 이상적인 해결책이 없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있지만) 사실 효율적인 정책 수행을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의사 통로에 모든 귀를 열어두는 것은 비합리적이며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하지요. 그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단점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정부 자체가 국민의 뜻을 귀담아 들을 마음이 없는 비도덕적인 정부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이 이론은 정부의 도덕성을 어느 정도 국민이 신뢰할 수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겠지요. 즉 홉스봄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쌍방향 교감'에 대한 의지가 없는 정부라면 국민의 입장에서도 막막해질 수밖에요. 그리고 그런 정부를 심판하는 것은 현재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선거밖에 없으며 그 선거는 일단 정치권자의 임기가 지나야 가능하다는 것 또한 민주주의의 단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어요.
21세기 초 정치적 폭력이 완전히 세계화한 시기를 말한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주도하는 미국의 정책과 19세기 말의 무정부주의 이래 최초로 국경을 초월해 세계로 무대를 확대한 테러가 어우러져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 (...) 사실 새로운 국제적인 테러망이 선진국과 아시아의 안정된 정권에 가하는 실제적인 위험은 무시해도 좋을 만한 수준이다. (...) 테러 운동의 현 단계가 상대적으로든 절대적으로든 강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증거다. 테러 운동은 현 시대의 증상일 뿐 결코 역사를 바꿀 수 있는 힘은 못 된다. (...) 그와는 정반대로 정부가 앞장 서서 비이성적인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래야 자신들이 갖고 있는 힘을 한층 강화하고, 또 사용하는 데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8장: 테러)
폭력의 시대에 공공질서를 저해하는 새로운 행위를 통제할 수 있을까? 그 답은 그렇다, 이지만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9장: 폭력의 시대의 공공질서)
폭력의 시대에 공공질서를 저해하는 새로운 행위를 통제할 수 있을까? 그 답은 그렇다, 이지만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9장: 폭력의 시대의 공공질서)
3년 전 런던에서 잠시 연수를 하고 있을 때 7.7 테러를 겪었었죠. 물론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건 아니지만 통신이 불능 상태가 되어 알고 지내던 분들에게 연락이 되지 않았을 때의 그 암담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침착함으로 대처했고, 세계가 꽤 감탄했었죠. 이후에 테러 용의자로 오인된 이슬람계 청년을 경찰이 쏘아 죽여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만 일단 테러에 대한 대중적 공포와는 별개로, 혼란에 잠시 빠졌던 사회 시스템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해요.
전 세계를 궁극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9.11 테러 이후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 정부였지만, 그리고 그 테러의 피해와 트라우마는 아직도 미국을 휘감고 있지만, 생각해 보면 대상이 불분명한 공포감을 제외하고는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시스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요. 미국은 지금도 여전히 초강대국이고, 멀쩡히 잘 돌아가고 있으며 기세등등하게 다른 나라에게 정치적 압력을 공공연히 행사하고요. 결국 세계가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공포감 조성을 무기로 자신들이 절대선이라고 믿으며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당연시하는 그 누군가들이라는 겁니다.
Posted by 레이